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평릉 사변 (문단 편집) === 사마의 사후 === 고평릉 사변의 2년 후인 가평 3년(251년), '''[[수춘삼반]]'''의 첫 번째인 왕릉의 난이 터졌다. 사마의는 초왕 [[조표(삼국지)#s-2|조표]]를 옹립하고 저항한 노신 [[왕릉(삼국지)|왕릉]]을 죽였으며, 조씨 황족들을 [[업성|업]]으로 이주시켜 감시했다. 보통 이후의 반란들과 엮어 반 사마씨의 기치를 내건 난으로 평가받지만, 사건 자체는 결국 시시한 [[찻잔 속의 태풍]]으로 끝났다. 다만 조조 시절부터의 오랜 동지이자 신임하고 태위직까지 맡겼던 친구에게 배신을 당한 사마의의 심리적 충격은 작지 않았고 4개월 후 그는 눈을 감는다. 아버지 사마의가 사망한 직후 사마사는 무군대장군 직을 제수받으며 조정의 대소사를 맡아 보게 되었다. '무군'은 조비가 사마의에게 제수함으로써 역사에 본격적으로 존재감을 알린 관직으로, 사마씨로서는 남다른 추억이 있는 관직이었다. 헌데 같은 무군대장군이라 해도 이 시기 사마사는 제 아버지와는 그 입지가 전혀 달랐다. 당시 사마의는 [[조휴]], [[조진]]이라는 막강한 조씨 인척들이 확고한 '상관'으로 있었으나 이 시기 위나라는 대장군 조상이 살해당하고 표기장군이었던 손자가 사망함으로써 1~2품 사이의 주요 장군직에 공백이 있는 상태였다. 그나마 거기장군 [[곽회]]가 있었지만, 곽회야 뭐 거의 평생 대촉전선 붙박이 천생 군인이었던 인물로 중앙정계와 거리가 멀었고, 당시는 나이도 많았던데다가, 결정적으로 왕릉의 난 때 (아내가) 연좌될 뻔한 것을 사마의의 은혜를 입어 구명받은 일이 있었으니, 애초에 사마씨에 선뜻 제동을 걸 인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사마의 때의 3공은 [[종요]], [[왕랑]]과 [[화흠]] 등 사마의보다 윗대이고 먼저 조조에게 충성을 바친 조정 원로들이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있었으나 230년을 전후해서 대부분 사망하였다.[* 왕랑은 228년, 종요는 230년, 화흠은 231년 사망했다.] 즉, 고평릉 사변을 전후하여 태위는 사마사의 숙부 [[사마부]], 사도에는 노구를 이끌고 고평릉사변에 앞장선 [[고유(삼국지)|고유]]로 앞의 둘은 확실한 사마씨 파벌에 속해있었으며, 사공직인 [[정충]]은 살짝 조상과 연이 있었다지만 애시당초 이 양반은 그저 시류를 따르는 조신한 선비로 뚜렷한 정치적 노선이나 야심과는 거리가 멀었고 훗날 서진에서는 태부까지 지내게 되는 사람이었다. 역시 제동장치는 커녕 사마씨 파벌이 장악한 거나 다름 없는 상황이었다. 무엇보다 심각했던 것은 황권 그 자체의 기반 약화였다. 과거 문제 조비, 명제 조예 부자는 유방과 손자라는, 걸출한 그늘의 실력자들을 일종의 비서실장인 중서감/중서령으로 두며 그들을 통해 직접 정치를 이끌어 나갔다. 이런 중서의 영향력은 명제 조예 시절 절정에 달했으나 그가 죽고 어린 황제 조방의 대에 이르러 고명대신인 조상/사마의가 전권을 틀어쥐면서 (특히 조상 때문에) 그 비중이 형편없이 줄어들었는데, 고평릉사변 이후 다시 이들을 기용하면서 중서의 권위가 부활할 듯 보였으나, 다들 연로한 몸이라 얼마 안 가 사망하고 만 것이다. 당시 조방의 나이 20세였다. 제대로 된 황태자 수업도 받지 못한 채 여덟 살의 나이에 제위에 올라 막강한 고명대신들의 그늘에 눌려 지내던 소년 황제도 이제 성년이 되었고, 때마침 두 명의 고명대신도 세상을 떠났다. 바야흐로 국정의 주도권이 그에게 돌아와야 마땅했던 상황. 허나 현실은 '사마의 섭정 체제'가 오히려 더 젊고 야심찬 인물인 사마사에게 그대로 내리물림된 꼴이었으며, 황제 자신의 수족이 되어야 할 중서체계는 조상 시절의 파탄을 여전히 극복하지 못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